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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

진공의 기초(2)

by 초콜릿맨 2022. 9. 8.

진공의 기초 진공의 역사

 

 

 

진공의 역사

우리는 공기라는 바다의 바닥에서 살면서 대기압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실제로 대기압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 몸 안에 내부 압력이 동일한 압력인 대기압으로 밀고 있어, 내부와 외부의 압력이 같기 때문이다.  높은 산을 등산할 경우, 높이 올라갈수록 공기는 희박해지고 압력은 감소하게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등산을 할 때에 풍선을 가지고 올라가면 높이 올라갈수록 풍선이 팽창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수은관을 이용한 대기압 실험은 높은 산에서는 수은 기둥이 낮아지게 된다. 또한, 날씨의 변화에 의해 수은의 높이는 변하게 되며, 아주 맑은 날보다 비바람이 거센 날의 수은 기둥은 더 낮아진다. 이와 같은 수은 기둥의 높이가 변하는 것을 이용하여 날씨를 예측할 수 있으며, 대기압이 떨어지면 비나 폭풍우가 올 것이라는 기상 예측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숨 쉬는 대기의 성분을 살펴보면, 질소가 약 78%, 산소 약 21%, 미량의 수분, 탄산가스, 헬륨, 아르곤 등의 여러 기체가 섞여 있다. 이러한 대기의 기체분자 수는 1cm2 공간에 대략 2.5x1019개가 존재한다. 대기 중에 기체들은 상온에서 음속(340m/sec)보다 더 빠른 속도(평균속도 440m/sec)로 움직이며, 다른 분자나 물체의 표면에 충돌하게 된다. 이때, 기체분자는 엄청난 압력을 가하게 되는데, 예로서 1기압은 1cm2의 면적을 1kg 정도의 무게로 누르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손바닥을 펼칠 경우, 성인 두 명 정도가 올라가 손바닥을 누르는 것과 동일하다.

 

 

1.2.1 진공의 태동

진공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2,400년 전인 그리스 시대에 이미 여러 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실험적으로 진공의 실체를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에 진공은 사고의 산물이었다. 먼저 그리스 시대에 위대한 철학자인 Socrates, Platon이나 Aristotle 등은 진공의 가능성을 부정하였으며, 이 시기에 진공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nature abhors a vacuum)."라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특히, Aristotle는 “우주는 연속적인 물질로 채워져 있으며, 자연에서 진공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지구상의 만물은 4가지 요소(4원소설)인 흙, , 공기, 불로 구성되며, 천상계에는 제5원 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제5원소의 개념은 잘 이해되지 않는 빈 공간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인 듯하였다. 반면에 일부 철학자들은 이에 반대하는 이도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B.C. 420년경 Socrates와 동시 대 인물이었던 Democritus는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고, 이는 처음으로 원자론에 대해 거론한 것이며, 또한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Aristotle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서 진공의 존재에 대해 주장하였지만, 3명의 위대한 대철학자들의 부정으로 인하여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Lucretius는 모든 물질이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서사시 형태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Empedocles는 모든 물질이 아주 가벼운 에테르(ether)라는 매질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 에테르라는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더라도 완전히 빈공간은 없다고 상상하였다. 이러한 에테르의 개념은 여러 형태로 변하면서 20세기 초에 Albert Einstein에 의해 무너지기까지 우주 만물이 그 안에서 헤엄치듯이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1.2.2 진공의 실험

이렇듯 중세의 암흑기는 과학사에 있어 기나긴 미혹의 터널과도 같은 시기였으며, 종교적인 관념으로 일관되었던 과학이 Copernicus, Galilei, Newton 등에 의해 서서히 타파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실험적으로 처음 진공을 입증하였던 Torricelli를 비롯하여 Pascal, Guernica Boyle 등과 같은 실험과학자들은 이에 깊은 자극을 받게 되었다. 아무튼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1643년에 실시한 Torricelli의 수은 기둥에 대한 실험은 진공을 증명한 진공 기술의 효시였고, 당시 과학에 있어 혁명적인 사고의 변화를 이끌었으며, 이 실험은 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을 자극하여 유리관의 수은 기둥 위에 만들어진 빈 공간 속에 숨어있는 성질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들이 이어졌다. 한편, Blaise Pascal은 공기의 압력과 진공에 대한 Torricelli의 경이로운 실험을 전해 듣고, 대기압의 변화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자연철학자 Rene Descartes의 견해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두 개의 수은관을 준비하여 산의 높이에 따라 수은 기둥의 높이가 변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하였는데, 1648년 해발 1,465m퓌드돔(Le Puy de Dome) 산을 오르면서 고도에 따라 수은의 높이를 기록하였다. Pascal의 실험결과로 산의 높이에 따라 공기의 압력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그는 "경이와 환희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기술하였다. 이들은 결국 수은과 유리관을 이용하여 진공의 실재를 보여주었고, 또한 pump를 이용하여 유리 기구 내에 공기를 빨아냄으로써 진공과 대기압, 즉 공기의 무게와 압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진공이 실험과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654년 독일에도 Torricelli의 경이로운 실험에 자극을 받은 사람으로 진공의 역사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Otto von Guericke이다. 그는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시를 이끄는 4명의 시장 중에 한 사람으로 무려 30년을 재직하였다. 그는 진공의 실재성을 공개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두 개의 잘 맞추어 진 청동 반구를 준비하고 시의 소방서로부터 지원받은 펌프를 이용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실험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데부르크 반 구실 함'이다. 진공 반구를 준비한 후에 Guericke"자연은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려는 시도에 강력히 저항한다."라고 주장하며, 준비된 반구에 각각 말 여덟 마리를 한 조로 구성하여 반구를 떼어 내도록 하는 극적인 쇼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반구는 깨지지 않았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Guericke는 밸브를 열어 반구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도록 하여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반구를 떼어 내었다. 이와 같은 진공실험을 통하여 과학자들은 지구에는 많은 양의 공기로 둘러싸여 있고, 공기가 지표면을 상당한 압력으로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진공에 대한 실험적인 성공은 당시에 많은 과학자들을 자극하기도 하였지만,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완전한 진공이 가능할지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으며, 우주에는 에데르라는 물질로 가득 찬 바다와 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물이 그 안에서 운동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고정적인 과학의 개념일 뿐, 애석하게도 에테르에 대한 존재를 알 수 있는 근거 나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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